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디라 간디 (문단 편집) ==== [[블루 스타 작전]](Operation Blue Star) ==== 1977년 총선에서 [[시크교]] 신자들이 많이 살던 [[펀자브]] 지방에서는 시크교 정당 '아칼리 달'이 과반을 차지하고 연정을 구성했다. 인도 중앙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시크교도들이 지방정부를 차지하자 경악한 인도 정부는 그나마 친정부적인 성향의 시크교 정통주의자 자르나일 싱 빈드나왈레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빈드나왈레를 지원하면 시크교도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 아칼리 달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내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빈드나왈레를 기껏 키워놓았더니 또다른 문제가 터진다. 빈드나왈레가 주도하는 종교단체 담다미 탁살이 또다른 종교 갈등에 휘말리면서 폭동을 일으켰고, 빈드나왈레는 이 폭동의 주동자로서 심지어 펀자브 케사리 신문의 사장 야가트 나라인을 살해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까지 씌워졌다. 시크교도 견제고 뭐고 폭동을 제어할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빈드나왈레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중앙정부는 어쩔 수 없이 빈드나왈레를 체포했다. 빈드나왈레는 경찰에 체포된 직후 인도 국민회의에서 탈퇴, 인디라 간디와의 관계도 모두 끊어버렸다. 그는 아칼리 달에 합류해 시크교 세력들을 모았고, 1982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크교도들의 자치권 향상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반정부 시위를 이끌었다. 이들의 분리주의 시위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던 인도 정부는 당연히 이들을 탄압했고, 이들은 점차 극단화되면서 무장 단체로까지 발전했다. 1982년 빈드나왈레와 그를 추종하는 200여 명의 시크교 무장 극단주의자들은 [[암리차르 황금사원]] 근처의 게스트하우스로 이주해 아예 아지트를 깔고 살았다. 빈드나왈레와 시크교 무장주의자들은 이 게스트하우스를 거의 요새로 개조했다. 1년여에 걸쳐 자동소총과 기관총, 탄약들을 구비해두면서 경찰들에 맞설 전력을 쌓았고, 수많은 시크교도 무장 세력들이 이 게스트하우스를 거점으로 무장행위를 벌였다. 거의 반국가 단체 수준으로 성장한 빈드나왈레를 두고보기 힘들었던 인도 정부는 1983년 4월 23일 펀자브 주 경찰차장 A. S. 아트왈이 이 사원을 출입하던 도중 빈드나왈레 세력의 총에 맞아 죽은 걸 계기로 빈드나왈레의 진압을 결정한다. ||[[파일:PHOTO-2022-06-03-16-22-18.jpg|height=300]]||[[파일:operation-blue-star1-1527817048.jpg|height=300]]|| ||블루 스타 작전으로 파괴된 [[암리차르 황금사원]] ||사원 내에 진입하는 인도 장성들. || 인도 정부는 지지부진한 협상을 끌다가 실패하자 결국 1984년 6월 1일에 인디라 간디는 평화적 해결을 포기하고는 암리차르 사원에 군대 투입을 지시했고, 이렇게 6월 10일까지 '블루 스타 작전'이 진행되었다. 진압 첫날에 인도 보안군은 사원에서 무장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기관총]]을 발포하여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8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일에는 펀자브 주에 36시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고 외부인의 출입과 모든 전기와 통신, 심지어는 수도 공급까지 차단한 후 군대가 [[탱크]]나 중화기들까지 가지고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포위했다. 당연히 시크교 최고 성지에 군대가 쳐들어갔으니 시크교도들은 뒤집어졌다. 빈드나왈레를 포함한 시크교 무장세력들은 격렬히 맞섰지만 당연히 국가의 정규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고, 얼마가지 않아 인도군은 시크교도들을 모두 제압하고 무장해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도군은 지나치게 무자비하게 진압을 했는데, 실제로 진압군은 헬기에서 총을 발포하기도 했고, 남자들을 손을 뒤로 묶은 채 집단으로 총살하거나 여성들을 강간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사람을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 죽이거나 '''엄마 품에 안긴 태어난 지 18일(!)밖에 안 된 아기'''에게 총을 쏴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6월 6일 저녁에는 임시 구금 센터 역할을 했던 방에 모인 사람들을 사원의 안뜰로 옮기고는 발포하여 민간인을 최소 70명(그 중 30명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진압군들은 '모든 체포된 사람들을 존엄과 배려로 대우하라'고 지시한 백서를 찢고는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대우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한 목격자는 군인들이 수감자들을 '마치 그들의 군대가 속한 나라의 시민이 아닌 외국인인 것처럼 대우했다'고 증언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압군들은 수감자들에게 음식은 커녕 물도 주지 않았으며, 물을 마시는 것을 허용할 때면 피가 섞인 물을 마시게 했다. 여담으로 당시 테러리스트로 판단되어 수감된 1,592명의 시크교도 중에는 2살~16살 정도밖에 안 된 39명의 시크교도 어린이들도 있었는데, 심지어 이 아이들은 1년 넘게 감옥에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식량도 제대로 주지 않아 진흙을 먹으며 버틴 경우까지 있었다. 이 [[폭동적 시위진압|폭압적인 진압]]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시크교 순례자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육군 83명이 죽고 시크교도 49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정부는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이 시크교도들이 인간 방패로 삼은 사원 안의 순례자들이라고 주장했다.], [[AP]]의 특파원 브라마 첼라니(Brahma Chellaney, 1962~)는 총격전으로 시크교도 780명과 군대 400명이 죽었다고 추산했고, 시체들을 치우고 화장하는 임무를 맡았던 펀자브의 경찰이던 아파르 싱 바좌(Apar Singh Bajwa)는 사원 단지 내에서 '800구가 조금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의 시체를 세었다고 증언했으며, 시크교 측에서는 5천~8천 명 이상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진압군은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시신들을 쓰레기 수거차에 싣고는 강제로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그리고 인도군은 탱크와 [[대전차포]], [[박격포]]로 포격까지 해댔기에 황금사원에도 상당 부분 파손이 가해졌고[* 실제로 사원에 남겨진 총알 자국이 '''최소''' 300만 개였다고 한다.], 란지트 싱[* Ranjit Singh, 1780~1839, [[시크 왕국]]의 건국자]의 유품들이 보관된 창고와 2만 점 가까운 필사본들이 보관되었던 도서관도 잿더미가 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인도 당국이 이미 도서관의 필사본들을 몰수해간 상태라 인도군이 도서관에 불을 질렀을 때 도서관은 텅 빈 상태였다고 한다. 이 필사본들은 오늘날에도 행방불명 상태이며, 최소한 117개의 '선동적인' 문서가 인도 당국에 의해 파기되었다고 한다.]. 인도 정부는 무장세력들을 토벌했다고 자찬했지만 국제, 국내적으로 시크교 사회의 비난이 쇄도했다. 하지만 인디라 간디는 이를 묵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